《변해가는, 그러나 변하지 않는》
김용선, 주용성, 최요한, 하다원, 휘휘
울산 중구문화의전당, 2025.08.06. - 08.24.
《변해가는, 그러나 변하지 않는》
양효실
가족/가정. 남녀가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아 키워 독립시키고, 늙어가는 문화적 행위. 사회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최소 단위. 법적 보호를 받는 커뮤니티 대(對) 급부상하는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 약한 아이들의 낮은 시선에서 드러나는 어른들의 욕망 극장. 완전한 사랑의 환상과 절대적인 결여의 실재의 이중주. 양파적 비밀들의 겹. “누가 안 보면 버리고 싶은 것”(기카노 다케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SA)” 중 하나. 계속 “수리 중”인 장소. 나의 모든 이야기들의 우물. 떠났다고 해서 계속 돌아가고 있는 구멍. 어머니 혹은 엄마. 고등어구이와 된장국. 중산층의 몰락과 그러므로 가족의 해체. 어떻게 네가 내게 그럴 수 있어? 가족사진. 기념일. 휴머니즘.
사진작가 5명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진을 찍고 그룹전을 한다. 변한다고 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 같다고 가족에 대한 공통의 관점을 공유한다. 가족 내 ‘주인공’이 특정되어 피사체로 등장하기도 하고, 불분명한 화면이 제시되기도 한다. 예술이란 취약함을 다루는 장르-매체이고, 자신의 가족에 대한 ‘고백적-1인칭적’ 이야기에서 작가는 더 약하고 더 불안하고 더 구석진 곳에 빛을 쏘임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역할, 집단적 가치에 충실할 것이다. 사랑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가족사진, 각자 자신의 역할에 맞는 ‘옷’을 입고 걸 맞는 자리에 있는 사진은 사진 작가의 사진일 필요가 없다. 사진 작가의 역할, 위상은 누구나의 매체인 SNS 이후 더 협소해지고 더 강력해졌다. 우리는 관객이 자신을 알아보는 사진을 어떻게 찍는지,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 것인지 안다. 작가의 사진이므로 우리는 그런 ‘스투디움’, 정보, 클리셰, 개념, 기능, 반복의 사진은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배우려고, 내 기대와 만족을 내려놓으려고 작가의 사진을 읽을 시간, 기회를 환대한다. 가족 극장에서라면 누구나 따르는 대본, 공감-동일시에 기반한 이야기들을 5명의 작가는 가급적 간과하려고 한다. 가족이라는 주제, 가족이라는 환상 속에서 이들은 잘 안 보이는 것을 포착하려고 하거나, 안 보이는 것들에게 과도한 애정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의 ‘보조적’ 역할을 존중하려고 한다. 가족을 찍은 사진은 고백적이면서 집단적이면서 나아가 정치적이기 까지 하다. 그 사진은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문화적 공통성이나 아비투스의 증거물이고, 권력의 역학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가족 내 불평등에 대한 목격-고발의 여지를 갖는다. 가족 사진은 작가가 잘 아는 대상, 사랑하는 대상, 그러므로 동시에 혐오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정동을 담지하기에, 이런 주관적인 관계를 목격하는 전시장 경험은 다소간 엿보기, 관음의 가능성을 보유한다. 동시에 사진 속 대상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적-집단적 ‘이름’이라는 점에서, 이들 사진은 동시에 인류학적-민속지학적 가치 역시 보유할 것이다. 나는 남의 주관적 경험을 몰래 엿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 자신의 사랑의 대상을 어떻게 사진이라는 장르-장치 안으로 초대해서, 그 대상에 걸맞는 ‘(사진적)분장(masquerade)’을 선물했는지를 볼 것이다.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환상을 일으키고, 희망을 고수하고, 상실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상처와 회복, 사랑과 환멸, 기대와 좌절, 이별과 귀향, 듣기와 상상하기와 같은 서로에게 언제나 의지하고 있을 정동적 움직임이 우리를 좀 더 인간적인, 좀 더 취약한, 좀 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있을 것임은 당연한 것이고. 근래들어 법적-생물학적 가족의 대안으로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 선택된 가족은 이번 가족 사진에는 없다. 이번에는 우리가 아는 가족을 놓고 우리가 잘 모르는 이상한 감정, 어긋남, 사랑, 연민, 상실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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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원의 <시차의 집에서 눈을 뜨면>은 대구 달성에 거주하는 작가의 외할머니 전금희를 ‘위한’ 것이다. 직전에 다원은 2017년부터 진주에 계신 구순의 친할머니를 방문해 할머니의 일상, 풍경, 집을 찍었고 독립출판물 형식의 사진집 《맞닿은 시간, 2025》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엄마, 혹은 나의 친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발턴’ 여성의 일상, 딱히 부각시킬 게 없는, 무미건조하게 시골 할머니인 여자, 일생 남의 집에서 안 보이는 사람, 희생과 봉사 혹은 노동이 전부인 삶을 산 여성의 환경, 물건들, 일상을 기록했다. 이것이 계속 ‘손녀’의 작업이라는 게 중요하다. 딸은 엄마에 대해서는 교차하는 애증, 분리불가능한 뒤얽힘을 재-경험하지만, 손녀는 할머니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르게 퍼지는 감정―연민이나 그리움, 유대―을 갖기 때문이다. 설사 할머니가 엄마를 학대한 시모였다고 해도. 계속 한 자리에서 주고 나누고 차리고 건사한 노인 여성은 손녀에게는 무엇보다 훈육하는 부모로부터 숨을 수 있는 품이다. 일하느라 바쁜 부모에게서 겪은 상실은 할머니가 채워준다. 이번에 다원이 연민과 그리움으로 품은 외할머니 전금희는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는 시댁에서 사고로 눈에 상처가 났지만 방치했고(아마도 밥 차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일하다가) 지금껏 사시(斜視)로 살아온 슬픈 역사가 있다. 2021년 즈음에 그 이야기를 들은 다원이 느낀 연민은 가족주의에서 방치된 자리, 삶에 공감이었고, 그래서 처음 들은 이야기에 무논리적인 책임감을 느낀 다원이 ‘한’ 일이 할머니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삶을 다시-보기였다. 외할머니는 왼쪽 눈으로는 아주 가까운 것들만 볼 수 있고 오른쪽 눈은 백내장을 앓는다. 다원은 자신의 카메라를 할머니의 눈의 구조에 맞추고, 할머니처럼 보면서, 타자-되기를 수행한다. 할머니는 이 집의 일부이고 이 집은 할머니의 몸의 확장이고 할머니의 사물들은 할머니처럼 시시하고 낡고 늙었다. 할머니는 아스라하게 사라지고 있고, 그 사라짐을 할머니의 눈에 포착되고 포착되지 않은 것들이 먼저 리허설할 것이다. 외관을 갖는 것들은 초점이 사라진 채로 거기 있고 심도를 갖고 끌어당겨진 것들, 왼쪽 눈으로 본 것들은 한 여성의 삶의 디테일들이어서 보기 죄스럽거나 보기에 밋밋한 것들이다. 그리고 가까운 이 두 할머니에 대한 연작이 향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미래의 작업인 것 같은데, 순서상으로 이런 말걸기-다가감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성 작가가 자신을 둘러싼 가까운 여성들에게 말걸기를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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